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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익산폭발사고의 기억
관리자
2009-11-11

 

■ 익산 폭발 사고와 외국인 교수들의 기억

[기고=이성택 원로(한국경영개발연구원장군장대학 석좌교수)/2009.11.11/전북일보]

벌써 32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당시 함께 있으며 죽음의 고비를 넘긴 외국인 교수들이 그날을 회상하며 보낸 글을 보니 다시 악몽 같은 순간이 떠오른다.

1977년 11월11일 밤 9시30분께였다. 익산역에서 펑, 펑 터지는 폭발음과 함께 건물 창문이 박살나고 유리 파편이 튀었다. 이날 다섯 나라에서 온 외국 교수들과 국제학술회의 결과를 정리하던 중 난리가 난 것이었다. 혼비백산이 돼 전주까지 실려와 눈을 떠보니 혼자였고 외국인 교수들이 걱정됐다. 다음날 사망자 명단에 그들 이름이 없어서 일단 안심을 하고 며칠 뒤에야 서신으로 그들이 겪은 그날의 악몽을 알게 됐다.

필리핀 퀸틴 교수는 바지가 다 찢어져서 세탁소에서 헐렁한 남의 바지를 입고 시청으로 안내 됐고 일본의 도리꼬에 교수는 안경이 깨져 피투성이 얼굴을 감싸고 경찰관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대만의 우쥬엔 교수는 허벅지까지 쌓인 유리를 밟으며 암흑거리를 걷다가 구조를 받았지만 발가락이 잘려 일주일 이상 병원신세를 졌고 미국에서 온 도날츠 교수는 그 경황에서도 코가 크다보니 미군인줄 알고 경찰관이 파출소로 바로 안내해 갈 길을 찾았다고 한다. 그날 회의의 대회장을 맡고 있던 필자는 긴장이 풀린 3일 뒤에야 얼굴 곳곳에 박힌 유리조각으로 인한 통증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바로 눈 위에 박힌 유리는 얼마나 깊이 들어갔는지 2년이 넘은 뒤에야 근육의 움직임으로 저절로 밀려나왔다.

익산역 폭발사고가 있던 그날은 전 시민이 피해자였고 건물은 붕괴되지 않았어도 심하게 멍든 상태였다. 병원에서 나온 뒤에 찾은 사고 현장은 여전히 비참한 꼴이었다. 하기야 사고 몇 달 뒤에 까지도 웅덩이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주인도 모르는 팔, 다리가 나오면 무작정 자기 가족 것이라고 가지고 시청으로 뛰어갈 정도였다. 사고 몇 달 뒤에는 창인동 작업장에서 내 이름이 붙은 코트가 발굴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옷이 그 곳까지 날아갈 정도의 폭발 위력을 생각하니 바로 사고현장 앞에 있었던 마당에 죽지 않고 살았음이 천행으로 생각된다.

고국으로 돌아간 외국인 교수들은 자국의 많은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시달리며 스타가 됐다고 한다. 퀸틴 교수는 귀국하자마자 AIM(아시아 경영대학원)회보에 글을 썼다. 자기가 호텔에서 나오는 길목은 유리의 빙산이었고 피투성이로 영정통 거리를 걸어가는데 시신과 신음소리 사이로 금은보석과 고급시계들이 널려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익산시민 누구도 훔치거나 약탈하는 이들이 없이 질서를 지키며 허겁지겁 이동하고 있었다며 양심 있고 훈련된 시민의식을 높이 평가했다.

다음해 필자가 강의 때문에 필리핀에 갔을 때 그 곳 기자들은 강의보다는 폭발사고에 대한 얘기들을 하며 많은 위로와 박수를 보냈다. 사실은 아비규환 난리통에 금덩이, 보석이 문제가 아니라 “또 폭발이 터질 염려가 있으니 빨리 대피하라”는 가두방송이 있어 누구도 발 밑에 차이는 금, 은, 보석을 챙길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사고현장에 있던 외국인 교수들은 오늘도 위대한 익산시민의 상처를 위로하며 일익번창하는 익산시민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또 당시 폭발사고의 빌미를 제공한 신모씨의 안부까지 걱정하고 있다. 지면을 빌어 당시 희생된 시민의 명복과 유족들의 안녕을 빈다.